신북 영팔정과 청백리 류관 선비 이야기

기고
신북 영팔정과 청백리 류관 선비 이야기
- 심심풀이 우리역사
  • 입력 : 2021. 02.15(월) 16:16
  • 영암일보
김오준 시인
금정면 출생 / 광주문인협회 이사
1392년 7월 17일 조선왕조가 건국되고 ‘조초청신’(조선초기 3대 청백리)이라 일컫는 조선 초기의 청렴한 신하는 류관(柳寬), 맹사성, 황희다.

하정 류관은 조선왕조 500년 역사를 통해 청백리의 대명사로 자리매김하였다.

영의정 자리를 탐하지 않은 채 4년 동안 우의정으로서 마흔 살이나 어린 손자 같은 세종을 모시며 한 치도 흐트러짐 없는 선비정신에 청백리의 좌표를 바르게 설정, 조선의 기틀을 튼튼히 세운 상신으로 평가되었다.

정1품 정승이 초가삼간에서 비가 새면 우산을 받쳐 들고 우산 없는 집을 걱정하는 여유와 그 위트에 절로 웃음이 난다. 더욱 아연한 것은 군소리 없이 이를 지켜보며 함께 가난을 즐겨야 했던 정경부인 안 씨의 심경은 과연 어떠했을까 하는 의문이다. 이런 사실이 세종의 귀에까지 들어가 5칸 집을 하사했건만 끝내 사양했다.

류관의 청렴정신을 지근에서 지켜본 13살 아래의 맹사성, 17살 아래의 황희에게는 감동으로 다가와 마침내 다 같이 청백리가 되어 임금을 잘 보필하여 월인천강을 만백성들이 읊었던 태평 세상을 만든 것이다.

우리 고장 영암군 신북면 모산리에는 60세 때 유관이 전라관찰사로 부임하여 이곳을 지나다 모산리 경치에 반해 큰아들 류맹문에게 정자를 짓게 했던 ‘영팔정’이 있다. 사방이 확 트인 조선 시대의 전형적 정자로서 오고 가는 길손들의 쉼터에 체험학습의 장이 되고 있다.

정자의 이름을 처음에는 모산리의 모 자와 하정의 정 자를 따 ‘모정’이라 했는데 훗날 이율곡이 정자에 들려 류관의 선비정신과 청렴을 기리는 8편의 시를 정자에 걸어 ‘영팔정’으로 개명했다. 지금도 주옥같은 2편의 시가 걸려있다.

류관은 은퇴 후 영팔정에서 노후를 보냈고 모산마을은 류씨 집성촌이 되었다.

▲ 영암 영팔정

세종은 류관을 위해 음식과 선물을 가끔 하사해 늙고 병든 신하를 걱정하며 위로했다.

하사품이 내려지면 류관은 동네 사람들을 죄다 불러 잔치를 크게 베풀고 마을 노인들에게 하사품을 나누어 주며 성은에 보답했다.

류관의 후손들은 할아버지의 선비정신과 청렴을 본받기 위해 모산마을에 ‘분비제’와 ‘죽봉사’를 지었고, 여기에서 공부한 후손 약재 류상운은 장원급제 후 숙종 때 청백리로서 영의정에 올랐고, 아들 만암 류봉휘도 영조 때 영의정이 되어 부자간 만인지상이 된 진기록을 남겨 가문을 빛냈다.

더욱 다행인 것은 류관의 후손들은 조선의 패망에 앞장선 노론 세력이 아닌, 핍박받은 소론계로 영보의 연촌 최덕지 후예들과 영계 신희남 후손들이 학연·혈연으로 얽히고설켜 후세에 큰 오점과 악명을 남기지 않았고, 나라가 어려울 때 의병과 농민운동 지도자들이 우리 고장 영암에서 많이 배출된 배경에는 류관 선비의 영향이 음으로 양으로 작용했기 때문이라고 여겨진다.

1433년(세종 15년) 5월 7일 류관이 88세의 수를 누리고 세상을 떠나자, 세종 이도는 날이 저물고 비는 주룩주룩 내리는데 애도하는 의식을 몸소 3일이나 강행했다.

장례식에 함께한 예조의 신하들은 날씨가 좋지 않다며 다음날로 미루자고 강력히 건의했지만, 세종은 슬픔 속에 흰옷을 입고 눈물을 쏟으며 ​손수 제문을 지어 그의 죽음을 애도했다.

​“경은 기질이 온후하고 성품이 넓고 깊어서, 학문은 고금의 사리에 통달하고, 재주는 정사의 요점을 꿰뚫었다. 중앙과 지방에서는 일을 성실하게 처리하였고, 세 왕대에 걸쳐 벼슬을 하였다. 경주에 나가 고을 원이 되었을 땐 백성들이 부모처럼 따랐고, 남방을 순찰할 땐 백성들이 사모하는 노래를 지어 불렀다.

​사헌부 대사헌으로서는 이단을 엄혹하게 배척하고, 재상의 지위에 올라서는 언제나 원칙을 지키며 사사로운 일로 찾아오는 사람이 없었으며, 창고에서 남아도는 재물을 찾아볼 수 없었다. ​지위를 낮춰 언제나 깔끔한 풍도를 지녔고, 덕은 높아도 교만한 태도가 없었으니, 선비들은 모범으로 삼았고, 관리들은 한결같이 존경하였다”라며 구구절절 극찬으로 류관을 추모했고 집현전의 젊은 신하들에게도 “황희에게 정무 처리의 해박함을 배웠고, 맹사성에게 삶을 즐기는 유연함을, 류관에게는 진정한 선비의 길을 배웠노라”라고 회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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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관은 1346년에 태어났다. 이름은 관, 자는 경부, 호는 하정(夏亭)이다. 본관은 문화 류씨로, 고려시대에 정당문학을 지낸 유공권의 7대손이며, 삼사판관을 지낸 유안택의 아들이다.

​26세 되던 1371년(공민왕 20년)에 문과에 장원급제하여 전리정랑, 전교부령을 거쳐 봉산군수, 성균사예 등을 지내다 조선 개국을 맞이했다. 그는 불교를 배척하고 성리학에 몰두한 학문적 인연으로 신진사대부들과 뜻을 같이해 조선 창업에 참여하여 원종공신이 되었다.

개국 후 그가 맡은 직책은 종4품 내사사인으로 태조 이성계에게 이틀에 한 번씩 국가정책의 잘못을 강의하는 일을 했다. ​이후 태조의 두터운 신임으로 간관의 수장인 정3품 좌산기상시에 발탁되었다.

류관은 직무를 다하기 위해 잘못된 정책을 건의하고 말썽 많은 기복 조치를 취지에 맞게 시행케 했다. ​기복(起復)이란 신하가 부모상을 당했을 때, 국가를 위해 상복을 벗고 등청하는 제도다. 당시 관리들은 상을 당하면 삼년상은커녕 채 백일도 채우지 않고 상복을 벗고 관직으로 나오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류관은 삼년상이 천하의 공통된 상례임을 강조하면서 나라의 중대사와 관계되지 않은 관리들은 반드시 삼년상을 채워야 한다고 주청해 이를 관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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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98년 류관은 정2품 형조전서에 제수되었다. 조선이 개국한 초기라서 사회가 어수선해 형법의 적용도 엄정치 못했다. ​가장 문제는 형평성이었다. 부자는 법을 어겨도 재물로 형을 대신하는 제도에 사람을 사서 형을 대신 받게 하는 경우도 허다했다. 류관은 이를 고쳐 부자든 가난한 자든 공평하게 법이 적용되어야 함을 강조해 시정했다.

또 하나 더 큰 문제는 고문이었다. 당시에는 고문이 성행했는데 경국대전에 근거하여 시행하는 관리가 드물었다. 형관들은 어떻게 해서든 피의자로부터 죄를 자백받는 데만 혈안이 되어 법에 명시되지 않은 지독한 고문을 가하는 경우가 많았다. 사건의 경중에 따라 명시되어 있는데도 지키지 않았다.

류관은 ​알현을 청해 “형벌 맡은 관리들이 생명의 귀함을 돌보지 않고 함부로 매질하여 원통하고 억울한 백성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형벌을 다루는 관리들이 함부로 고문할 수 없게 하는 법을 만들어야 합니다”라고 끝까지 주청해 윤허를 받아 냈다.

류관은 형법에 밝아 개혁에 앞장섰기에 온갖 모함과 시기로 유배와 파직도 여러 차례 겪었다.

​류관은 일흔아홉에 우의정이 되었고 여든이 넘자 벼슬을 버리고 낙향을 고하자 세종은 이를 허락지 않아 여든넷이 되어 은퇴했다.

56년간 벼슬살이 녹봉은 고아와 거지 등 빈민구제와 홍수로 무너진 다리를 고치는데 다쓰고 비가 새는 초가삼간에서 우산을 쓰고 살았기에 세상 사람들은 한양에 있는 집을 ‘우산각’이라 했고 겨우 비를 피할 수 있다며 ‘비우당’이라 불렀으며 태종 이방원도 울타리를 쳐 보호해 주었다.

이러한 류관의 청렴정신은 그의 직계 후손은 물론이요. ‘지봉유설’을 쓴 외손자인 지봉 이수광도 외할아버지를 본받아 청백리가 되었고, 1755년 영조 때 나주 괘서사건의 중심인물인 원교 이광사의 아들 이긍익도 외가인 모산리에서 자라나 ‘연려실기술’을 저술, 실학을 제창해 훗날 다산 정약용이 이를 계승하여 그 유명한 목민심서가 세상에 탄생한 것이다.

▲ 류관 하정공 영정 [사진=문화류씨종친회]



김오준 시인

금정면 출생
다산학회 회원
영암학회 회윈
광주시인협회 회원
광주문인협회 이사
한국지역문학회 이사

영암일보 yailbo@daum.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