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과 편지

고전산책
눈과 편지
고전명구 사백 세 번째 이야기
  • 입력 : 2024. 04.18(목) 11:46
  • 영암일보
바람이 맑게 불거나 달빛이 밝게 비추면 유윤(劉尹)이 허순(許詢)을 떠올리고는 했다거나 큰 눈이 쏟아진 밤 대규(戴逵)가 보고 싶어져 길을 나선 왕휘지(王徽之)가 정작 그의 집 앞에서 배를 돌려 돌아왔다는 건 세월을 일천육백육십 년쯤 거슬러가 보아도 사람을 그리워하는 사람의 마음이란 언제나 같다는 이야기.

그러나 더욱이 눈은 문득, 오는 것이다. 봄의 바람과 여름의 비, 가을의 볕마저도 소리와 함께 찾아오건만 눈은 기척도 없이 내린다.

눈이 오면 세상이 가까이서 닫히고 소리마저 가만히 삼켜지는데, 사람은 오히려 먼 데 있는 누군가를 그리워하고 전해지길 기필하지 않은 마음을 수군거린다.

예순여섯 해 전의 시인이 ‘나의 사랑을 한없이 잇닿은 그 기다림으로 바꾸어 버린’ 사람에게 ‘즐거운 편지’를 썼던 적도 ‘밤이 들면서 골짜기엔 눈이 퍼붓기 시작’할 즈음이었다.

황동규(黃東奎) 시인이 태어날 무렵 ‘이 겨울에도 눈이 가득히’ 내리자 눈 내리지 않는 나라로 가신 누나 생각이 나서 ‘흰 봉투에 눈을 한줌 옇고 글씨도 쓰지 말고 우표도 붙이지 말고 말쑥하게 그대로 편지를 부칠까’했던 건 윤동주(尹東柱). 모리야마 나오타로(森山直太郞)가 다시 만나지 못할 사람에게 부치지 않을 편지를 쓰던 때도 ‘고요한 밤에 가랑눈이 내려 쌓이듯 그대를 향한 그리움이 고요히 내려 쌓일’ 무렵이었다.

<러브레터>와 <윤희에게>에서 까닭 모를 편지를 보내오던 곳 또한 북해(北海)의 설국(雪國). 그러니까 누군가가 사위의 눈 속에 파묻혀, 받는 이의 세월이며 풍경은 아랑곳 없이 제 창밖처럼 하얀 종이 위에 편지를 쓰고 있던 것이다.

<8월의 크리스마스>에서 정원은 ‘사랑도 어디쯤에선 반드시 그칠 것을 믿’기에, 처음이자 마지막 편지를 써 주소를 적고 우표까지 붙이고도 상자 속에 간직한다.

그렇게 닿을 리 없던 마음이 문장 아닌 사진으로 에둘러 전해진 건 도리어 한 계절쯤 지나 눈이 함빡, 내려 쌓인 날이었으니 눈이 다림을 그리움의 앞으로 이끌었던 것이다.

권호문(權好文)은 깊은 산속 적막한 선창(禪窓)에 눈이 내리자 김팔원(金八元)이 자꾸만 그리워져 편지를 부쳤다지만 그의 마음은 언제나 설산(雪山)을 넘어 닿았을까.
‘오늘 자네를 찾고팠지만 이처럼 눈이 왔으니 어떻게 할까?

오늘이 아니 되면 내일이려나?’라며 이광석(李光錫)에게 대설(大雪)만큼 길고 넓은 편지를 쓰던 이는 이덕무(李德懋). 편지는 아니지만 김시습(金時習)이 「산거집구(山居集句)」100수를 얽은 일 또한 소리 내는 것이라고는 반춤을 추는 대숲뿐인 겨울, 눈 내리는 밤이었다.

자유(子猷)가 다만 돌아왔던 건 안도(安道)를 향한 마음의 수군거림이 다하였기 때문이니 그는 눈 내리는 강 위에서 마음으로 편지를 썼던 것이다.

눈은 사람을 그리움에 달뜨게 하였다가는 머지않아 가만하게 한다. 눈은 소리 없이 내리지만 그것만으로도 소식(消息)인 까닭이다.


송호빈 고려대학교 한문학과 조교수
영암일보 yailbo@daum.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