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 여행의 백미는 뭐니 뭐니 해도 시장 구경

고전산책
외국 여행의 백미는 뭐니 뭐니 해도 시장 구경
  • 입력 : 2023. 11.09(목) 12:41
  • 영암일보
여행에는 여러 가지 목적과 형태가 존재한다. 문학과 역사의 현장을 찾아가는 답사도 있고, 연구를 목적으로 오지를 헤매는 탐험도 있고, 참회나 경배의 마음으로 성지를 도는 순례도 있다. 특수한 몇몇 경우를 제외하면 일상에서 벗어난 해방감이나 호기심에서 비롯된 흥
분을 만끽하는 것이 대개 여행의

매력이다. 낯선 풍물을 구경하고
재미난 음식을 맛보며 여행 오기를 잘 했다는 행복감을 새삼 느끼기도 하는데, 이러한 즐거움을 한꺼번에 누릴 수 있는 곳이 있다면 어딜까. 나는 단연 외국 여행에서 만나는 시장 구경이라고 생각한다.
논밭과 산을 빼면 도무지 볼 것이라곤 없는 깡촌에서 자란 촌놈들

이 으레 그렇듯이 어린 시절부터
나는 유난히 시장 구경을 좋아했다. 장날만 되면 어머니를 따라 읍내에 가고 싶어 생떼를 쓰곤 하다가 장터에 돌아다니다가는 버릇 버린다는 어른들의 호된 꾸지람을 듣기 일쑤였다. 어쩌다 운 좋게 어머니를 따라 장에 가는 날이면 거의 정신이 혼미해질 정도로 흥분했는데, 아마 그것이 내가 처음 경험했던 여행의 즐거움이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이런 개인적인 경험 탓도 있겠지만 나는 외국 여행을 나갈 때도 시장 구경을 유난히 좋아하여 단연 여행의 백미로 꼽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여행에 대해 나는 한때 ‘동적(動的)인 은둔’이라 정의해본 적이 있다. 복잡하게 얽혀진 다양한 사회적 관계망을 한시적이나마 단절하고 떠난다는 점, 그 어떠한 현실 사회의 책임에 대해서도 잠시 벗어나 도피한다는 점, 방외인이라는 익명의 존재로서 지상의 세계 위를 부유한다는 점, 그리하여 세상에서 받은 상처를 치유하고 자신을 들여다보는 시간을 갖는다는 점, 때문에 정신이 가장 고양되어 있다는 점 등에서 여행자는 은둔자와 여러모로 비슷하다. 그런데 이방인으로 부유하던 여행자가 잠시나마 여행지의 인간들과 섞여 비린내 나는 그들의 삶 속으로 발을 들여놓는 순간이 있다면 현지의 시장을 구경할 때라고 여겨진다. 이것이 내가 해외 여행에서 시장 구경을 좋아하는 또 하나의 이유이다.
박제인은 43세 되던 1860년 봄에 부사로서 사행길에 오른다. 청나라 함풍제의 생일을 축하하러 가는 사절이었다. 2월 30일에 서울을 떠나 8월 17일에 홍제원에 도착하였으니 거의 6개월에 이르는 대장정이다. 이때의 연행 일정을 『연행일기』에 자세히 담았다.
명나라에서 조선 선비들의 유학을 원천적으로 금지한 이래 우리나라 사람이 국외로 나가는 기회는 중국과 일본으로 사행을 떠나는 것이 거의 전부였다. 태어나서 자기 고을을 한 번도 벗어나지 못하고 삶을 마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던 시대에 국경 밖으로 나가는 것은 실로 엄청난 경험이다. 때문에 관료로서 책임 의식의 발로이든 일생의 특별한 경험을 작품으로 남기려는 작가의식의 발로든 사행을 다녀온 많은 문인들이 대부분 사행에서 보고 들은 것을 시문으로 남겼다.
초기의 연행록에는 여행자로서 느끼는 흥분이나 호기심은 거의 드러나지 않는다. 대신 외교관으로서의 책무의식이나 향수가 주조를 이루는 가운데 후임 사절을 위한 필수 매뉴얼 작성이라는 목적의식이 간간이 비쳐졌다. 여행자의 시각으로 연행을 기록한 것은 한참 뒤의 일이다. 18세기 박지원의 『열하일기』가 연행 문학의 최고봉으로 꼽히는 근본적인 이유도 여기에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다가 19세기에 들어서서는 연로의 풍물 자체에 호기심을 가지고 마치 오늘날 여행지를 동영상으로 촬영하듯이 작가의 시선에 따라 있는 보이는 대로 기록하는 흐름도 감지된다. 박제인의 『연행일기』가 대표적이다.
공무의 여가에 박제인은 시장 구경을 갔다. 외교수행이라는 무거운 짐을 벗고 잠시 여행자로서의 즐거움을 만끽하려는 것이다. 박제인이 담아놓은 북경 시장의 모습에는 국가 관료로서의 책무감이나 지식인으로서의 학구적 의욕 또는 청나라를 바라보는 상투적 역사 인식이 없다. 북경의 낯선 시장 풍경을 어린아이 같은 시선으로 한껏 즐기고 있을 뿐이다. 일체의 사회적 강박에서 벗어나 오롯이 여행을 즐기는 시간. 이 또한 좋지 아니한가. 왁자한 외국 시장의 생동하는 소리가 지금 여기까지 들리는 듯하다.









한국고전번역원 이규필
영암일보 yailbo@daum.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