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멍하는 시간

고전산책
숲멍하는 시간
  • 입력 : 2023. 12.14(목) 13:48
  • 영암일보
평소 여행을 좋아하는 편인데, 요즘에는 바삐 구경하고 다니는 것보다 한곳에 머물며 산이나 물을 가만히 바라보는 시간을 선호한다.
최근에 ‘불멍’, ‘숲멍’, ‘물멍’과 같은 말이 유행하는 것을 보면, 나만이 즐기는 독특한 여행법은 아닌 듯하다. 그런데 산이나 물, 불을 그저 바라보는 것이 어떤 즐거움을 주냐고 묻는다면 딱히 뭐라 대답할지는 모르겠다.

남유용의 「자암의 대필에 붙인 발문(自庵大筆跋)」도 일종의 숲멍에 대한 경험을 쓴 글이다. 자암의 대필은 16세기 명필 김구(金絿)의 “고요함 속에 하늘은 광대하고, 한가한 가운데 해는 길다[靜裏天大 閒中日長]”라는 글씨이다.
원래부터 하늘은 광대하고 해의 길이도 일정할 텐데, 왜 고요하고 한가한 가운데서 새삼 느낄 수 있다는 것인가.
남유용은 “오사모에 띠를 두르고 길에서 호령이나 하며 달려가는 자와는 하늘의 광대함을 말하기에 부족하다.
부지런히 잇속이나 챙기면서 자신의 처자식을 돌아보며 있네 없네 말하는 자와는 해가 긴 것을 말하기에 부족하다.”라는 형 남유상(南有常)의 말을 떠올리며 김구의 글씨에 대한 자신의 해석을 덧붙였다.
당장의 이익과 권력을 좇느라 바쁘게 살아가는 사람에게 광대한 하늘과 장구한 시간을 돌아볼 여유란 없다.

남유용은 이어 산에 올라가 풍경과 만물을 한참 동안 바라보다가 내려왔던 한가한 어느 날의 경험을 이야기하였다.
산속의 변화무쌍한 만물을 가만히 바라보며 자신 안에 충만해지는 즐거움에 집중하는 시간이었다. 다른 만물이 즐거운지 즐겁지 않은지 분명히 알 수는 없지만 광대한 하늘 아래 함께하는 존재라는 것을 깨달았다는 것이다.
여느 유학자의 격물치지 공부처럼 만물에 내재한 심오한 이치를 찾으려고 노력한 것은 아니었다.
그야말로 요즘 사람들이 말하는 ‘숲멍’과 같은 시간을 보낸 것이다.
자신과 만물에 밀도 있게 집중하고 나니 하루 해가 길다는 사실도 새삼 알게 되었다.
남유용으로서는 어쩌면 자신을 둘러싼 우주에 대한 근원적인 성찰을 경험한 시간이라 할 수 있다.
조정의 고위 관료로 누구보다도 바쁜 삶을 살았을 남유용이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저 멍하니 보낸 시간은 그에게 소중한 경험으로 남았다.

2022년 한해도 이제 저물어간다.
이맘때면 한 해 동안 어떻게 살아왔는지 되돌아보는 시간을 가지곤 한다. 돌아보니 순식간에 일 년이 지나간 느낌이다.
잘 살았는지는 모르겠지만,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바쁘게 살아왔으니 올 한해도 그리 잘못 산 것은 아니라고 스스로 위안해 본다. 바쁜 것은 잘살고 있음을 판단할 수 있는 척도가 아니던가.
하지만 때로 바쁘게 살면서 중요한 것을 망각하고 있지는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남유용의 글은, 바쁜 걸음을 잠시 멈추고 광대한 하늘과 긴 시간 속에 놓인 자신을 한 번쯤 멍하게 응시하기를 권한다.
삶의 의미와 같은 거창한 답을 얻지 못하더라도 속으로 충만해지는 즐거움은 다른 시선으로 자신을 바라보게 하는 힘을 주지 않겠는가.
그렇다면 멍한 시간은 그저 멍하게만 낭비해버리는 시간은 또 아닐 것이다.


한국고전번역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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